메멘토모리의 기독교비평연구소
[너의설교를비평한다] 소강석 목사의 인문학 시리즈_우리, 총 맞은 것처럼_에베소서 4:29-32_새에덴교회 본문
[너의설교를비평한다] 소강석 목사의 인문학 시리즈_우리, 총 맞은 것처럼_에베소서 4:29-32_새에덴교회
Memento Mori Pastor 2021. 1. 24. 21:35설교란 것은 교수의 강의나 유명인의 강연이나 선동가의 연설과는 그 의미 자체가 다르다. 무엇이 다를까? The Motivation of Speach. 즉, 동기가 다른 것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 원인이 다르다. 설교에만 집중하여 이 문제를 논의해보자.
설교자는 자신의 설교에 대해 주도적 존재로서 설 수 있는가? 아니다. 설 수 없다.
설교자는 자신의 의지나 자신의 주장을 성도에게 전달 할 수 있다? 아니 그럴 수 없다.
그렇다면 설교자는 무엇을 위해 하나님과 성도의 사이에 서 있는가?
바로 2000년이란 시간 사이에 감추어져 버린 하나님의 말씀을 성도들을 대신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영적인 공무의 의무로서 서 있는 것이다. 즉, 성경을 읽고 하나님의 말씀을 그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그대로 이 시대에 맞게 맞추어 전달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설교는 반드시 성경에서 출발해야 하며 본문의 연구를 통해서 나와야 한다.
이러한 전제를 다는 이유는 앞으로 있을 소강석 목사의 설교에 이러한 전제를 반드시 달아야 하기 때문이다. 본문에서 출발하지 않은 설교는 설교가 아니고 강연이 아니고 연설이 아니며 강의도 아니다. 즉,,,,, 존재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허구의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무의미하단 뜻이다.
1. 본문의 적절성 (13/20)
아마도 소강석 목사는 이 본문은 성도들과 교회 안에서의 관계를 언급하려고 했던 걸로 보인다. 그런데 여기서 본문을 연구하지 않았다는 메멘토모리의 추정이 나온다. 에베소서의 4장 29절만 본다면 단순하게 한글성경으로 본다면 이것이 교인들과 욕이나 험담 또는 상처를 주는 언행등을 <더러운 말>이라고 표현했을 거라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나오는 <더러운> 이란 뜻은 원어로는 σαπρός 로 정확하게는 <쓸모없는, 가치없는> 뜻을 포함하고 있다. 여기에 반대되는 용어로 <선한 말>이라고 나오는데 엄연히 말하면 이 <선한>이란 뜻의 반대 말은 저 위의 <더러운>이 아니다.
바울이 말하는 <선한>이란 뜻의 반대 단어는 kakoj로 이에 대한 이해를 가장 쉽게 돕는 것이 빌립보서 3장 2절이다.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몸을 상해하는 일을 삼가라
여기서 행악이란 뜻이 바로 kakoj라는 헬라어이고 이 단어는 바울이 복음을 다르게 전하는 이단을 지칭할 때 쓰는 단어이다. 다시 말하면 더러운이란 뜻의 바른 번역은 이단의 악한 말을 뜻 한다.
즉, 바울은 성도들 간의 욕설이나 싸움, 다툼, 아니면 약간의 가십이나 험담보다 그들 사이에서 퍼지는 복음의 이단의 말을 더 경계했단 것이다. 바울이 쓸 수 있는 최고의 욕이니 얼마나 바울이 싫어하고 경멸하는지 알게 되는 구절이다.
즉, 저 구절에서 성도와 교회 안에서 서로 착한 말하고 서로 상처주는 말 하지 말아라란 말이 아니라 헬라의 헛된 무의미한 철학이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단의 복음으로 바꾸어 말하지 말라는 경고인 것이다. 즉, 성도들 간에 "바른 복음을 말하라"라는 뜻으로 봐야 한다. 그리고 솔직히 바울은 성도들간의 도덕적 티격태격까지 신경을 그렇게 크게 쓰지 않았다.
이에 대한 나의 성경 해석이 뒷받침 되어주는 근거는 30절에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한다는 뜻에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언급했듯이 성령을 근심케 하는 죄는 영원히 사하심을 받지 못한다. 그런데 과연 성도들간의 가십거리나 험담이 성령을 근심케 했다면 우리는 모두 구원을 받지 못했을 것이고 소강석 목사의 설교는 무용지물이 되어버린다.
2. 예화의 적절성 (10/20)
우선은 본인이 이 설교를 들으면서 예화의 적절성을 언급하기가 너무 힘든게 너무 많은 예화가 잡다하게 비구조적으로 쓰였기 때문이다. 그래도 굴직한 것 몇개만 집고 넘어가겠다.
①백지영 예화
우선 내가 생존해있는 셀럽 예화를 절대로 하지 말라는 이유는 사람이란 죽기 전까지 또는 죽은 후에도 어떠한 평가가 이루어 질지 모르기 때문에 정확하게는 사망한지 약 50년 이후의 사람들을 사용하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한 셀럽에 대해서 다양한 각도에서 연구와 평가가 이루어지고 난 뒤면 설교 예화로 사용해도 큰 무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소강석 목사는 백지영 가수에 대한 예화를 곡과 곡에 대하는 그녀의 태도를 언급했다. 우선 백지영 가수는 과거 성에 관련된 안좋은 파문이 있었고 이미 기사에 그의 남편 정석원에 대한 불미스러운 일로도 미디어에 오르락 내리락 한 적이 있다.
수많은 가수와 수많은 유명인이 존재하는 가운데 굳이 위험성을 감수한 예화는 쓰지 않는 것이 백지영씨에게도 그리고 설교자에게도 좋은 자세이다.
그리고 저 예화를 쓸때 제발 백지영씨에게 허락을 맡았기를 기원한다.
②출석교인 지목
설교 중에 본이 되는 교인이 앉아있으면 그냥 무시하고 설교하면 된다. 절대로 지목하면 안된다. 다시 말하지만 사람은 언제나 양면이 존재한다. 목사가 보기에 좋더라도 그가 처한 직장이라던지 아니면 가정에서든지 아니면 교회 안에서 어떠한 평가가 내려지는지 모르게 되고 담임목사가 주일예배때에 한사람에 대해서 좋은 평가만 내려준다면 그 성도에 대한 다른 객관적 평가 중에 안좋은 평가들은 사라져야 만 한다.
제발 저런 짓은 안하셨으면 한다.
3. 설교의 시간(13/20)
설교는 설교 시간만으로 총 46분이 걸렸다. 35분까지 봐주더라도 11분이 지나간 상태였으며 불필요한(노래부르기) 로 인해 지연되었으므로 11분이 대한 설교 시간을 너무 허비했다고 봐야 한다. 내가 봐온 설교자들의 모습을 보면 대부분 설교 준비를 제대로 못했거나 대지만 써놓고 나머지 부분을 즉흥적 설교로 대체하다 보면 설교의 시간이 길어진다
4. 설교자의 자세 (16/20)
외모에 대해서는 특별히 지적할 사항이 없다. 그러나.............. 넥타이는 반짝이가 아닌 걸로 하시길 부탁드리고 설교자의 자세 중에 언제나 정자세로 서야 하지만 너무 목이 굽은 것 같아 거북목의 현상이 보이는 것 같아 내내 불편했다. 건강을 위해서라도 자세를 바르게 하시고 설교하셔야 할 것 같다
5. 수사학 (1/20)
설교학의 입장에서 수사학을 논하도록 하겠다. 간단하게 논하겠다. 너무 힘들다...
- 노래를 못하면 설교 중에 노래를 하지 마라. 설마 잘해도 설교 중에는 노래하지마라. 노래는 찬양인도자가 하니까 하지마라
- 이 설교는 본문이 없는 설교다. 소강석 목사의 생각과 연륜이 본문이 된 교훈이기 때문에 설교가 될 수 없어 그 어느 스피치 군집에도 속하지 않았다.
- 설교를 준비하지 않은 것이 보인다. 학자의 입장이나 또는 전문적 견해가 나오는 부분은 읽고 그 외에는 원고를 보지 않는다. 원고를 보지 않는 부분에서는 성경 본문에 근거하지 않은 이야기나 기행(노래부르기, 웃긴표정 짓기, 갑자기 찬양부르기)이 나온다.
이로 비추어봤을 때, 유추 할 수 있는 것들은 1. 본인이 설교를 다 쓰지 않았거나 2. 설교 원고를 외우지 않았거나 3. 설교의 대지만 쓰고 나머지는 제대로 쓰지 않은채 단에 섰거나 4. 애초에 틀 만 본인이 잡고 나머지를 누군가가 채워줘서 엔터테인 형식으로 나와서 읽었거나 이다.
언제나 설교의 실습에서 나오는 유머인다. "내형이 없으면 외형이 나온다"이다. 즉, 퍼포먼스나 제스쳐가 강렬할 수록 내용이 없다는 뜻이 된다.
실제로 본인은 이 설교를 세번 들었지만 아직도 이 설교가 저 본문과 뭔 상관인지 모르겠다.
총 점수는 F다.
설교학적으로 F다.
D를 주고 싶었지만 다시한번 채점하는 메멘토모리에게 기회를 주고자 F를 줬다. 내가 틀렸을 수도 있으니.......
힘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