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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자영감설과 성경무오설에 대한 나의 생각

Memento Mori Pastor 2020. 12. 8. 2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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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자영감설은 어려운 말 같지만 풀어 설명하면 매우 쉬운 가설이다.

 

성경을 쓸 때에 저자를 통해 성령이 주도하셔서 기록하셨기에 한글자 한글자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 쓰여졌다는 것이다.이 가설에 반드시 따라와야 하는 것이 바로 성경무오설이다. 성경무오설은 말 그대로 성경은 전혀 오류가 없다는 가설이다. 우리는 이 가설이 왜 가설로 밖에 남을 수 없는지 그리고 왜 이것이 학문이 될 수 없는지 알아볼 것이다.

 

1. 축자영감설과 성경무오설을 인증할 자료가 없다

 

축자영감설과 성경무오설은 그 가설을 입증할 자료가 존재하지 않는다. 성경이 존재하지 않느냐라는 질문이 나올 수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자료는 성경이 맞지만 원본을 말한다. 성경 원본이 없고 사본만이 존재하는 이상 이 두가지 설을 입증할 자료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것은 신앙이나 종교적 신념으로 주장될 수는 있지만 학문으로 인정되기는 불가능하다.

 

2. 성경은 그리스도 교회의 신앙 후에 공식화되었다

 

우리가 말하는 성경 중 구약은 이미 유대인들에게서 정경화되었으니 차치하고 신약만을 논하자면 신약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뒤 약 15년에서 20년 뒤에 집필되었다. 학자들은 주후 55년에서 70년 사이에 마가복음이 제일 먼저 집필되었다고 말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신약성경의 저자 중 어느 누구도 자신의 책이 성경이 될 것이라 생각했거나 그것을 염두해두고 쓰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들 각자가 처한 환경에서 각자의 공동체에 맞는 신앙의 정도를 가르쳐주기 위한 책과 편지들이었다. 그러한 성경이 363년 라오디게아와 397년 카르타고 공의회에서 27권의 책이 신약 정경으로 인정되었다.

 

상식적으로 이미 성경이 성경임을 입증한다면 왜 그들은 성경을 모여서 인증하는 작업을 했을까? 그리고 이미 몇백권의 외경과 위경 사이에 그들은 어떻게 성경과 외경과 위경을 나누었을까? 그것은 바로 이미 그리스도 공동체 안에서 공유되고 있는 복음과 그에 대한 신학이 정립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이 먼저가 아니라 그들이 사도와 선조들에게 받은 복음과 가르침이 먼저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축자영감설과 성경무오설은 여기서부터 배척된다.

 

3. 이 두가지 설이 옳다고 한다면 지금 우리는 거짓 복음을 읽고 있는 것

 

무조건적으로 이 두가지 설이 옳다고 전제를 해보자. 그렇다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우리의 손에 쥐어진 성경은 가짜 성경이 된다. 왜냐하면 우리 손에 들려진 책은 수많은 오타와 잘못된 번역 그리고 수많은 사본들을 통해 원본에 가깝게 편집된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앞서 말한바와 같이 그리스도 교회들은 원본을 보관하거나 원본 그대로 완벽하게 전수하지 못했다. 우리가 가진 것들은 필사된 사본들을 통해서 연구된 결과물이다. 백번 양보해서 히브리어와 헬라의 책만이 정경이라 한다면 우리는 번역 본이 아닌 원서로 책을 읽고 있어야 할 판이다.

 

4. 본디 그리스도인들은 책의 무오성을 위해 산 것이 아니라 단순한 예수복음을 위해 살았다

 

사도행전에 사도들이 그리고 제자들이 복음을 전했을 때는 신약성경이 없던 시기다. 그러나 그들이 현세보다 더 복음으로 살았던 이유는 그들의 복음은 너무나 간단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전해야 할 복음이 사도행전의 베드로 설교에서 나온다. 그들에게 있어서 책의 무오성보다는 발로 걸으며 구원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더 중요했다. 아이러니하게 신이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완전 오류 아닌가? 그것을 전하는 책이 성경책일진데 이미 오류 투성이라 하겠다.

 

5. 성경이 오류가 있는 것이 바른 것이다

 

유한은 무한을 품지 못한다. 너무나도 당연한 철학 문구 아닌가? 인간이 신의 언어를 땅의 언어로 적는 과정에 성령의 도움으로 무오한 책을 쓴것 자체가 신성모독이다. 왜냐하면 유한은 무한을 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성령을 온전히 품는 자가 왜 신을 필요로 하는가? 중요한 것은 오류가 존재하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예수가 그 오류를 품고 하나님께 인도하느냐 마느냐의 문제다. 즉, 우리가 아니라 예수가 사념적 질문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

 

예수가 오류투성이 속에서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분인가의 질문이 옳은 질문이다.

 

만약 그분이 그렇다면 우리는 성서의 오류를 당연스레 받아들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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