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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설교를 비평한다] 주안장로교회 주승중 목사/ 10월 4일 주일예배 설교/ 왕상 18:46-19:4 본문

돌아온 설교의 실제

[너의 설교를 비평한다] 주안장로교회 주승중 목사/ 10월 4일 주일예배 설교/ 왕상 18:46-19:4

Memento Mori Pastor 2020. 10. 7. 2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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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주승중 목사의 10월 4일 설교를 기반으로 비평했음을 알렸다.

 

5가지로 나누어 설교를 비평했으며 각 채점 조항은 1. 총 설교 시간(25-30분), 2. 예화의 적절성 3. 본문의 적절성 4. 설교자의 자세, 5. 설교의 기교(수사학) 이며 각 조항은 20점으로 총 100점이다.

 

1. 총 설교시간 (19/20)

 

총 설교 시간은 유투브에 업로드된 총 주일예배 영상에서 설교시간은 21:45에서부터 54분 30초까지이며 약 33분이 소요되었다. 이 설교 시간은 이상적인 시간이다. 앞 뒤 기도시간을 계산하지 않으면 약 31분이기 때문에 가장 알맞게 설교시간을 소요했다. 또한 설교의 흐름이 처음부터 끝까지 멈추거나 맥락이 끊기지 않았다. 도입에서 결말부분까지 총 33분 동안 설교의 기준이 될 만큼 좋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설교 전에 기도로 시작하는 것은 불필요하였고 또한 설교 후에 기도가 이어지기 때문에 설교 전에 하는 기도는 하지 않았어야 했다.

 

2. 예화의 적절성(19/20)

 

도입에서 에베레스트의 하산에서 일어나는 사고 예화와 엘리야가 갈멜산 기적 사건 이후에 내려와 일어나는 사건이 잘 맞아들어가는 설교였다. 또한 엘리야의 실족함, 그리고 그 이유와 배경등이 현재 성도들의 코로나 펜더믹과 잘 부합하였다. 또한 학자의 학문의 인용등도 적절하였다.

 

3. 본문의 적절성 (16/20)

 

본문은 성도들에게 주어지는 첫 복음이며 첫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설교의 성경본문은 그 단락을 나누는데 신중을 기해야 한다. 만약에 전혀 다른 맥락의 본문이 끼어들게 되면 설교자는 그 맥락까지 설교해야 함으로 시간을 더 소요하게 된다. 만약에 그 본문을 무시한다면 그것은 설교자로서의 의무를 저버리는 행위이다. 또한 설교본문에 없는 내용을 설교하게 되면 그것은 설교자의 교만이다. 

 

오늘 본문을 주승중 목사는 18장의 마지막 절에서부터 다음 장에서 등장인물이 바뀌는 절까지 설교 본문을 잡았다. 그러나 엘리야와 갈멜산 사건의 본문 자체가 너무 길고 많은 장을 할애하며 여기서 어떻게 본문의 단락을 나누는가가 관건인데, 주승중 교수는 18장의 여호와란 단어가 나오는 46절과 엘리야가 낙심의 절정을 보여주는 4절까지로 잡았는데 우선은 갈멜산 사건과 그 이후의 사건에 어정쩡하게 걸친 본문이라고 볼 수 있다.

 

주승중 목사는 꽤 많은 시간을 갈멜산 사건 이전 배경과 원인을 설명하는데 시간을 할애하였다. 그러나 설교의 중심은 19장 3절에 있음으로 오히려 중요한 구절보다 덜 중요한 구절에 설교시간을 더 할애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코로나 팬더믹 상황이 길어진 가운데 오히려 이 설교를 2번 정도 나눠서 할 예정있었으므로 (설교제목이 엘리야 1이다.) 우선은 갈멜산 사건 중 엘리야가 바알선지자들 속에서 승리하는 상황을 먼저 설교하고 그 이후를 엘리야 2로 설교했어야 했지 않았나 싶다.

결과적으로 과유불급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4. 설교자의 자세 (14/20)

 

설교자의 자세는 다양한 것이 속하여 있다. 우선은 외모가 단정하고 깔끔해야 하며 앞머리카락이 이마를 가리지 않아야 한다. 또한 적절한 손동작과 좌우의 균등한 시선분배 등이 중요하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설교자의 자세는 설교 원고를 10번 이하로 보는 것이다.

 

설교자가 설교를 30분을 하게 되면 적절한 속도로 설교를 읽을 시에 11포인트 6장에서 8장이 나온다. 물론 설교 원고를 다 외울 수는 없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설교자의 시선이 설교 원고에 자주 가게 되면 설교를 듣는 성도와의 시선이 끊기고 교감이 사라지게 된다. 또한 설교 원고를 10번 이상 보게 된다면 설교자는 설교를 제대로 숙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게 된다. 그러나 설교자 주승중 목사는 총 30분 이상의 설교 동안에 30번 이상 원고를 보았다. 이는 1분에 한번씩 보았다는 것이 된다.

 

설교학 교수였음에도 가장 중요한 설교자의 태도를 준비하지 않음은 가장 큰 감정 요인이 되었다. 제보에 의하면 주승중 목사 본인이 설교의 실습 수업 시간에 설교 원고를 10번 이하로 보는 것을 강조했다고 한다.

 

5. 설교자의 기교 (15/20)

 

설교는 사람들 앞에서 복음을 전하는 기술이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수사학같은 기교가 필요하다. 똑같은 톤으로 가만히 서서 글을 책읽듯 읽으면 당연히 사람들은 지루해 하고 복음이 잘 전달되지 않게 되기 때문에 기교는 반드시 필요하다. 그래서 강조할 때의 악센트라던지 톤의 높낮이라던지 분명한 발음이라던지 손동작이라던지 좌우의 시선처리라던지 이와 같은 것이 필요하다.

 

그러면 이와같은 기교는 어떻게 잘 발휘될까? 그것은 바로 여유와 순발력이다. 아무리 설교를 잘 준비하더라도 설교 중인 상황에서는 다양한 상황이 발생한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언제나 성도를 바라보며 상황에 맞추어 설교에 변화를 줘야 한다.

 

그러나 본인이 보기에 주승중 목사의 설교는 자신의 설교를 전달하기에 다급한듯 보였고 또한 마치 설교자로서 시험대의 오른 사람처럼 계산된 기교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쉽게 말하면 현장에 없어도 온라인으로 봐도 다를바 없는 설교, 자신의 설교만 전달시키고 성도와는 교감을 가지려는 모습은 찾기 힘들었다. 물론 설교자가 준비한 설교를 100프로 쏟아내는 것이 중요하긴 하지만 자신의 준비한 것을 100프로 쏟아내는 것과 성도와 교감하는 것은 종이 한장의 큰 차이를 만든다.

 

총평

 

점수는 100점 만점에 83점으로 학점으로는 B이다.

 

설교학 교수의 이력을 가진 목사답게 설교학 관점에서 보자면 기준이 될만한 설교이다. 만약 자신의 설교가 부족하거나 설교의 기준점을 잡고 싶다면 주승중 목사의 설교를 벤치마킹한다면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본인은 설교를 재시청하면 할 수록 마치 내가 설교실습의 감독관이 되고 주승중 목사가 설교실습의 대상자가 된 것처럼 느껴졌다. 마치 설교대회에서 우승한 학우의 설교를 듣는 모습이 오버랩되었다고 할까?

 

목회자로서 대형교회를 이루어낸 목회자들이 꼭 설교학에 부합한 설교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그들이 경험한 설교의 상황 속에서 긴 시간동안 성도들과 교감하며 만들어진 설교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설교학 교수는 그러한 것보다는 설교학이란 기준점을 잡아주는 것에 익숙해져 있다. 그러므로 아직도 설교학 교수로서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반쪽짜리의 설교라고 평가하고 싶다.

 

한줄로 요약하자면 좋은 설교지만 굳이 현장에까지 걸음하여 들을 설교는 아니다. 온라인으로 들어도 현장과 같은 느낌의 설교라고 평가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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